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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13, 2011

법화경의 方便과 眞實

불교에서 方便이란 사상은 아주 중요하다. 방편의 의미는, 중생이 부처 즉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경지로 끌어들이는 길도 방편이다. 후자는 대승불교의 입장이고 전자는 초기불교의 의미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가르침도 방편이다. 가르침은 그대로 깨달음은 아니지만 깨달음에도 인도해 준다.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하나 즉 一乘이지만, 배워야 할 사람의 능력, 소질, 성격은 허다하다. 그 많은 근기에 상응하여 가르치는 방법도 하나일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 "내가 성불한 이래 가지가지 인연. 가지가지 비유로 널리 가르치니 방편이 수없이 많다"고 하였다. 그 목적은 "중생을 인도하여 여러곳의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방편이란 수단으로서 진실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모두 방편이 된다. 따라서 三乘의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방편력에 의해 설해진 법이다. 그런데 이세가지 다른 果에서 각각 안주한다면 부처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화경은 그 궁극목적을 밝히고 三乘의 과득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三乘의 과득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 이상 아라한 벽지불도 모두 佛道를 구하려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누구나 보살임을 자각하여 전진해 가야 한다. 혹시 불제자 성문의 입장에서 그것이 궁극목적이라 생각하였더라도 부처님의 마음에서 보면, 그 아라한이란 성불로 가는 과도단계이므로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진실인 佛乘를 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중생의 근기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심에서 부처님이 수단으로 이끈다는 것이 方便사상이다. 이 方便은 법사품에서는 [방편문을 여는것이 진실상을 시현한다]고 하였다.

방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것이 방편임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직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편이 방편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진실이 나타나 밝혀진다. 이 방편과 진실의 양자사이에는 앞뒤가 있지 않다. 三乘이 方便이라고 감득했을때 一乘이 진실임을 터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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